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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mpse of the way

아름답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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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이 깊어진다는 말은 경험과 지식을 연마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井底之蛙-우물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 하늘이 광대무변한지 전혀 모르고 우물의 모양 만큼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보고 느낀 그 테두리 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은 많은 함축 의미가 있다. 여기에는 견문이 짧아 어떠한 정보, 지식, 눈높이의 데이터가 저장되지 않은 결과치므로 사물과 사람을 볼 때 가치척도가 상당히 미약한데도 당위조차 이유를 댈 수 없는 개구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한즉슨 우물 안 개구리가 보는 모든 일체는 편협하며 모순적이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경험과 대화를 통한 지식, 사회적인 수준, 직업, 생활 수준까지도 일면식으로 알게 될 수는 있다. 어떤 개인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모든 것을 통칭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 하라주쿠나 시부야의 거리에서 만나는 촌티가 물씬 나는 코스프레를 한 젊은 여자나 이상한 머리 모양을 한 남자들을 볼 때 가차 없이 평가절하된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외모에서 풍기는 경박한 느낌이 전부가 된다. 다른 표현으로 다이칸야마의 오후,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잘 꾸미지도 요란한 화장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모습에서 연륜이 묻어나오는 지성미가 흐른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보고 객관화하면

 

전혀 생면부지인 일면식도 없는 두 케이스에서 객관적인 느낌은 대다수가 필자와 비슷할 것이다.  즉 아름다움에는 촌스러움과 경박함을 탈피한 어느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언발란스가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요란한 옷차림을 한 얼굴이 반반한 사람이라도 그의 내면이 텅 비어 있으면 얼굴에서 티가 난다는 말이다.

 

 

결국 이러한 이유는 다시 견문이나 지식이나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미숙함으로 돌리고 싶다. 가구, 그릇,패션에도 원숙한 미가 있다. 아무리 유명한 상표라 할지라도 사용하는 주체자들의 수준이 떨어지면 결국 최고의 가치에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내면의 성숙한 경지가 아니면 이내 식상한 법이다. 가끔 미인대회의 미인, 좀 예쁘다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1시간이면 지루해진다. 내면의 교양은 고사하고 가치관조차 정립되지 않은 쇳소리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한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핸섬하거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있어 대화의 장을 열다 보면 교양은 고사하고 무례나, 무지한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과의 대화는 그날로 끝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아름답다는 말은 누드모델의 벗어 놓은 부끄러움 없는 몸이 아니며 머리가 텅 빈 미인에게도 하기 아까운 말이다. 그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 웨지우드와 코펜하겐처럼 영원한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의 생각이 바뀌어도 미의 가치 기준은 변하지 않는 최고를 지향하듯이.

 

 

결국, 아름다움은 안목과 상당한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끊임없이 통찰하는 능력을 배우기 위하여 견문과 지식이 겸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촌스러움과 모자란 명제에 쉽게 아름다움이란 최상의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양과 지성과 내면의 성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원숙한 단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부단히 노력하고 견문을 넓히고 세상을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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