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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mpse of the way

Erich Fromm -에리히 포롬의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포롬의 1976년 To Have or to Be?는 having and being과는 다르지만 센셔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어떻게 그는 존재와 소유를 반토막으로 분리하면서 사랑의 법칙을 그토록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었을까.

 

사회는 점점 물질화되고 끝없는 자유와 물질적 풍요로움을 즐기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함으로써 수많은 인위적인 편리함도 도모되었으며 희망의 최고를 치닫는 무제한 생산과 무제한 소비가 높아지고 있는 작금에 신을 갈망하면서도 인간은 원초적인 쾌락과 욕망의 성취를 이루고자 불만과 지루함의 시소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살고 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에리히포롬은 인간이 가장 이성적이고 인간답게 살기를 권유하는 소유와 존재를 분리했다.

 

 

에리히포롬은 독일인이지만, 유대인의 탈무드에 심취하여 랍비의 글들만 연구한 사람이다. 그러나 버거운 훈계가 현대인에게 먹혀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과학은 추상의 변증법을 도태시키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감정을 이성으로 정립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함이다.

 

 

사람도 그렇다.

노자가 어떻고 공자가 어떻다고 하면 귀를 막아버리는 세상이다. 되지도 못한 사람이 항상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고 그 좋은 성인군자의 이야기를 몰라서 사람들이 실천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윤리적인 잣대는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한 사람에게도 최종의 모럴은 있는 법이다.  서양의 도덕군자 에리히포롬은 과연 얼마나 소유와 존재를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소유와 존재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에도 에리히포롬은 존재와 소유를 반 토막을 쳤다. 그는 탈무드에 심취한 나머지 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가상의 허구이며 현실세계에서 식상된 이론인 것처럼.

 

자 그렇다면 에리히포롬의 소유나 존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사랑에는 소유가 먼저다.

소유함으로써 존재하는 너를 만나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다. 내 안의 너를 찾아서 나의 마음으로 끌어가는 것이 소유다. 그럼에도 소유는 배제하고 존재하자고 한다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너, 나는 나 그 객체적 존재를 마주 서서 바라보자는 말인데. 거기에는 상당한 모순과 괴리를 발견하게 된다.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크게 보면 가상의 시나리오가 형성된다. 인간의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냉철한 이성적인 인간으로 분류하게 된다는 말이며 그러한 인간은 지구 상에 한 명도 없다. 만약 애인이, 부부가, 부모와 자식 간의 존재만을 인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무관심과도 같게 된다.

 

 

관심을 두고 생각을 하고 만나고 보고 싶고 이해하는 이러한 소유적인 감성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원숙한 인간의 최상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까. 이론은 참으로 그럴싸하지만 그런 실천은 시몬느와 드 보부아르 같은 지랄 맞은 동거인에게 어울릴 수 있다. 동거를 평생하면서 다른 애인을 인정하던 그들은 그것이 마치 숭고한 의식처럼 말하고 글로 썼다. 그들의 밥벌이를 위한 전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상대는 다른 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고 가정하자.

이때 나는 상대의 존재함에 더욱 의미를 두고 마주 보는 객관적인 관계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치정살인이나 이혼도 없을 것이고 세계의 모든 이성과 부부는 이별이 없을 것이다.

 

존재만을 원하면 자신의 소유가 멀어지고 소유만을 가까이하면 나라는 존재는 상대적으로 힘을 쓸 수가 없다.

내가, 나를, 나만이라는 객관적 존재는 소유함으로써 마모되고 연마되어 변화를 하게 된다. 나를 고수하고 나의 것, 내 생각만 강조하는 존재는 소유될 수 없는 피상적 존재이다.

 

 

에리히포롬은 이성적이고 냉철한 존재야말로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랑법으로 기술했지만, 그것은 전혀 공감될 수 없는 가상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많은 철학자의 이론이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글에는 진실이 배제되어 인간이기를 포기하거나 인내때문에 살 가치를 잃게 되는 것으로 본다.

 

 

소유나 존재

이렇게 분류하면 글로는 존재하는 네가 되지만, 실제 소유하는 네가 되어야 인간은 만족하게 된다는 말이다. 읽고 또 읽어도 피상적이라서 오히려 그는 그렇게 살다 갔을까? 의문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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