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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mpse of the way

존재의 기술에서 사랑을 배워라.

에리히포롬의 소유냐 존재, 사랑의 기술,  존재의 기술은 그가 평생 내놓은 세 권의 책이며,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은 The Art of being 존재의 기술이다. 이번의 책은 비논리적 소유나 존재를 탈피하여 점진적으로 원숙한 테크닉으로 인간의 본질 접근이 가능한 저술로써는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책의 제3장의 trivial 즉 하찮다는 장이 있다.

하찮다는 것은 라틴어로 tri-via 세 갈래로 나뉘는 지점으로서 즉 시시하고 모자라거나 보통 얕은 것, 또는 도덕적인 품격의 저하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가장 하찮은 것은 무엇일까.

자신에 관하여 쉼 없이 이야기하는 병, 아이, 여행, 성공담, 자기가 한 일, 중요해 보이는 셀 수 없는 많은 자랑거리 등은 사실 듣는 대상에게는 그저 하찮은 거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나라는 중심의 존재하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은 주관적 관심거리이며 타인에게는 그저 하찮은 거리라는 말이다. 그 관심이 타인의 추앙이나 존경을 받으려면 상당히 객관화 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알려진 명예, 거대한 지위 등의 표면적인 모습과는 별개이며 사기술과도 멀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하찮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사악하고 사디스트적이고 파괴적이고 삶에 적대적인 사람으로 에리히포롬은 정의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인간관계의 법칙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 법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자로 분류했다. 특히 하찮은 사람과 사귐을 피하는 것에 대하여 에리히 포롬은 이렇게 말했다. 다정함 뒤의 감추어진 불성실성, 불행에 대한 끝없는 하소연, 가려진 파괴성, 매력적 모습에 가려진 자기 도취 ,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외양에 넘치는 거짓말, 반사회적, 불합리한 행동과 불협화음의 사회성 결여 등의 성격을 가진 자는 개인의  자유와 용기를 해치거나 침해하면서 인생을 망가뜨리기를 즐긴다는 점이다.

 

인간이란  행동하고 만들고 창조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활동적이지만 허공에서 활동이 아닌 생명력의 연장이다. 그 중요한 것의 일부가  몸이다. 몸이란 주택, 자동차, 비행기 그러한 것을 잘 다루고 만들고 이용하고 소비해야 한다. 그 몸 자체를 소유 쪽으로 지향한다면 사실상 무엇이든지 소유할 수 있다. 몸이란 동적인 모습만으로는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 그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이상이나 무소유는 물질과 몸만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존재성 지향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할 때만이 소유와 존재는 이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만의 양식만 추구한다면 사랑하는 남녀는 무조건 동거하고 결혼하고 같이 살아야 한다.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기보다는 소유만 갈망한다. 쉽게 말해서 결혼하고도 그 소유의 갈증이 해결되면 다시 이혼, 외도를 꿈꾸고 또 다른 동거를 꿈꾸고 다른 이성을 쫓는다. 대상과 목적물 즉 소유에 의한 파괴적 본능만을 추구한다. 사랑의 능력, 이성의 능력, 생산적 활동의 능력이 대상물과 소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외눈박이 소유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 이성, 생산적인 활동은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이 바로 정신의 지배와  존재의 지향은 정신으로 집중되어 있으므로 포괄적으로 다양한 인식을 한다. 하지만 소유 지향의 사람 또는 하찮은 사람은 대상물만 바라다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소유적인 인생으로 끊임없는 공허와 갈등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대개 자각과 자기 발전은 도외시하고 내적인 성숙과 자아 성찰은 고사하고 파괴적이고 저급한 행위들만 자행하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성격에서 비롯된다. 가정과의 도태, 사회성 결여, 복잡한 이성 교제, 동거, 별거를 반복적으로 하면서도 죄책감이나 죄악감이 없다면 그 원인이 어디인가를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진실, 사랑, 정의, 善 이러한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삶의 뿌리를  흔드는 사악하고 하찮은 자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삶을 어떻게 살기를 갈망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목적도 바라보는 방향도 다르다는 점을 들고 싶다. 그저 함부로 살면서 인생의 행복이나 성공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쌀도 씻지 않고 밥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다. 행복은 성취와 욕구의 충족으로 부단히 노력하기에 결과가 있듯이 부정적이고 부당한 방법으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지하고 싶다.

 

 

 

또한 사랑과 진실을 나누어 말하거나 소유와 존재를 분리하여 이중적, 피상적 논리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엄중한 결과는 본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갈 것이다. 진실을 외면한 거짓의 사랑은 존재하지 못하듯이 존재 없는 소유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존재하는 내가 있기에 바라볼 네가 있으며, 그 너는 항상 사랑과 진실을 공유하기에 너를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만약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면 진실 없는 사랑 즉  거짓된 사랑도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은 다시 말하여 사랑하는 모든 이가 거짓을 말하고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만약 지금 누군가 사랑한다면 그 저변에 깔린 바닥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보라. 그와 그녀가 무엇때문에? 왜?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내려진다면 그것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이라고 했을 때 과감하게 자신의 모든 가면과 허울, 거짓, 부끄러움을 내려 놓고 상대에게 고백을 하여야 할 것이다.

 

 

에리히포롬은 존재하는 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 하찮은 장을 만든 이유가 있다.

과연 세상의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그 경우의 수에 해당한다면 어떤 모습이든지 중요한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내가 되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로써 나는 존재하고 있으며 사랑을 하고 있으며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는 객체인가를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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