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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Diplomacy

일본 역사의 인물 오다 노부나가

 

 

일본은 대표하는 두 인물이 있다. 사가모토 료마와 오다 노부나가다. 이들은 15세기와 150년 전 사람임에도 일본의 우상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이유에는 일본의 근대사의 통일과 일본의 개혁에 막강한 조력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일본 중흥은 어려웠다. 그러나  일본의 중요한 사람들은 살해되었거나 자살했다. 사가모토 료마의 자객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그 증거가 희박하며 결국 중요한 역사의 인물을 해친 닌자들만 살아남아서 현재의 정치 후손들이 되었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이상한 성격자로 각인하거나 함부로 매도함을 불식시키기 위한 필자의 연구에 의한 몇 가지를 서술하고자 한다.

 

1534―1582 그는 일본 막부의 황실 정치를 소멸시키고 중앙정권 즉 노부나가 정권을 이룬 사람이다. 전국시대의 종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며 그가 만든 행정부를 그의 부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이루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열게 된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의 거대한 두 획의 한 사람인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치의 주역이며 사가모토 료마는 일본 신세대를 연 사람이다. 마쓰모토 회사의 기업의 시스템 역시 사카모토 료마의 발상임을 안다면 근대화의 두 사람을 일본에서는 존경하는 인물이다.

 

 

특히 사화를 근거로 살펴보면

 

信長の家臣・太田牛一信長公記

이 책에서는 오나 노부나가의 죽음 직전을 절묘하게 묘사한 구절이 있다. 그가 아이들과 부녀자를 미리 피난시키고 本能寺の変을 맞이하는 대목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볼 줄 안다고 했으며 부하들을 내 보내고 할복하여 죽었다고 설한다. 

 

宣教師フロイスは、日本史

또다른 책은 선교사 프로이스의 일본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날 그 선교사는 本能寺 혼노우지에 숙박한 증인이다. 무사들과 차 시중하는 여자들만 있었으며 화살이 날라 오는 중에 무기를 들고 그가 대응할 수 있었지만 얼굴과 손을 씻고 이후 할복했으며 크게 절이 화재로 탔다고 증언한 기록이다.

 

 

安土・桃山時代の公家・山科言経の日記である『言経卿記』には、天正十年(1582六月二日について、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る 1582년 기록을 보면 二日、戌子、睛陰、一、卯刻前右府本能寺へ明智日向守依 謀反 押寄了、則時に前右府討死、同三位中将妙覺寺を出了、下御所へ取籠乃處に、同押寄、後刻打死、村井春長軒己下悉打死了、下御所は辰刻に上御所へ御渡御了、言語道断之爲體也、京洛中騒動、不及是非了
 いずれも事実だけを列記した簡潔な内容だが、京都中が混乱状態に陥ったというのは、想像に難くない。

그의 죽음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다. 교토에서는 이 일로 반란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간략하게 보도한다.

 

 

本城惣右衛門覚書 는 책에서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누군가 치러 가는데 대비하지 않고 그는 아이와 여자들을 보내고 죽음 맞이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수많은 문헌의 공통점은 그가 대항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일본 전국의 19명의 각각의 성주를 치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살생이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특히 사찰 승려들의 힘이 막강하고 암살이나 음모를 꾀하는 절부터 처지 하는 것은 전쟁의 일으키는 자의 소행일 것이다. 여기에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고 그가 막무가내의 성격이며  부하를 괴롭히는 소인작배는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를 암살하고 하극상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는 태생적으로 머리는  좋았지만 애당초 성악설의 근본 기질이  있었다는 점을 주지하고 싶다.

 

 

 

그러한 이유가 있다. 만약 아케치 미츠히데가 인격적 성격이라면  동료인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 암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의 관계에서 이미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높이 보는 노부나가에 대한 반발과 질투심이 결과를 치닫고 배신을 하게 됨이다.

 

 

그렇다면 왜 노부나가는 그의 그런 사실을 알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죽이지 않았던가? 그의 힘에 밀려서? 아니면 무서워서? 이부분은 좀 더  분석하자.

 

 

문헌에서 그가 한말을 살펴보자

 

 戦に勝るかどうかと兵力は必ずしも比例しない
比例するかそうでないかは戦術、つまり自身にかかっているのだ

 

전쟁에서 승리는 병사의 수와 비례하지 않는다. 전술과 자신에게 달려 있다.

 

およそ勝負は時の運によるもので、計画して勝てるものではない。功名は武士の本意とはいっても、そのあり方によるものだ

 

대체로 승패의 중요한 것은 시간의 운이 있다. 계획적 승리가 아니며 명자의 사무라이라 해도 본의가 아닌 방향으로 의한다.

 

絶対は絶対にない

절대란 절대가 아니다

 

愚かな間違いを犯したら たとえ生きて帰ってきてもワシの目の前に姿を見せるな

어리석음과 우들 범하면 설령 살아 돌아오더라도 독수리의 눈에 뛴다.

 

組織に貢献してくれるのは「優秀な者」よりも「能力は並の上だが、忠実な者」の方だ

조직에서는 우수한 자 보다는 능력이상의 충실한 자다.

 

いつの時代も変わり者が世の中を変える。異端者を受け入れる器量が武将には必要である

언제나 시대를 변화하는 자가 나온다. 이단자를 받아 들이는 데는 새로운 무기 증강이 필요하다.

 

器用というのは 他人の思惑の逆をする者だ

손재주 역시 다른이의 생각에 반대하는 자다.

 

攻撃を一点に集約せよ、無駄な事はするな。

공격은 한데 모아라, 쓸모 없는 일처럼

 

理想を持ち、信念に生きよ。
理想や信念を見失った者は、戦う前から負けているといえよう。
そのような者は廃人と同じだ。

이상을 가지고 신념을 키우라.

이상과 신념이 없는 자는 전쟁에서 패한다. 마치 깨지는 도자기와 같다.

 

必死に生きてこそ、その生涯は光を放つ

필사적으로 살 때 그 생은 빛난다.

 

だいたい人は、心と気を働かす事をもって良しとするなり

대체로 사람은 마음의 기가 움직여 일이 좋아짐이다.

 

死のうは、一定

죽음도 정해진 것

 

藤吉郎(秀吉)は何が不足なのか。浮気など言語道断です。(中略)
しかし、やきもちはいけない。夫の世話をちゃんとして、言いたいことがあっても言わない方がいいでしょう

히데요시 부인에 묻는다. 남편의 부족이 무엇인가? 바람기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나 질투하지 마라, 남편의 잘 알아서 하게 하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하지 마라. 

 

人間の50年の生涯は儚いものだ。死なない者は存在しない。

인간의 50년 생은 덧없다. 죽지 않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生まれながらに才能のある者は、それを頼んで鍛錬を怠る、自惚れる。
しかし、生まれつきの才能がない者は、何とか技術を身につけようと日々努力する。

타고난 재능이 있는자는 스스로 단련하고 재능이 없는 자는 기술을 익혀라.

 

 

幼名吉法師。尾張の那古野(名古屋)城の城主、織田信秀の子。生まれた城は那古野城、勝幡城の2説がある。妹はお市の方(市の娘は豊臣家として散った淀君)。家系は尾張守護代の清洲織田氏の三奉行のひとつ。
1546年、12歳で元服(成人式)して信長を名乗る。14歳の時に美濃の斎藤道三と父が同盟し、その証として道三の娘と結婚。17歳で父が病死、家督を継く。若い頃の信長は服装や行動が奇天烈で、大通りを人の肩にもたれ掛かって栗や柿を手掴みにして食い歩くなど、「大ウツケ(頭がカラッポ)」と世間から呆れられていた。父の葬式に髪を派手な紐で縛り、袴もつけず着流しで現れ、仏前に進み出るといきなりお香を鷲づかみにし、位牌に投げつけて帰る傍若無人さでひんしゅくを買った。
それだけではない。信長は父の病気が回復するであろうと保証した祈祷師・仏僧らを、“虚偽を申し立てた”として寺院に監禁し、外から戸を締め「今や自らの生命に念を入れて偶像に祈るがよい」と言い放ち、鉄砲隊に包囲させ射撃命令を下した。信長は生き残った仏僧を指さし、憤激して言った。「あそこにいる欺瞞者どもは、民衆を欺き、己れを偽り、虚言を好み、傲慢で僭越のほどはなはだしい。予はすでに幾度も彼らをすべて殺害し殱滅しようと思っていたが、人民に動揺を与えぬため、また人民に同情しておればこそ、予を煩わせはするが、彼らを放任しているのである」と。合理的主義者の信長は神仏の存在を全く認めていなかった。

 

그는 나고야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부친과 동맹을 맺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그의 부친의 병이 확실하게 나을 것이라는 승려의  사기에 거짓말을 하는 자에 오만한 자로 칭했으며 몇번이고 그들을 죽이고자 했으나 동정이 남아 살려 두었다는 점과 그는 주술적 미신의 불교를 상당히 거부했던 합리주의자였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적 사관이 뚜렸한 사람이었다.

 

 

翌年18歳の信長は天下取りに向けて動き出す。まずは自国尾張を統一せねばならない。最初に清須の坂井大膳を攻め、19歳で主家の織田信友を倒し、23歳には野心家だった弟信行を暗殺し、最後は尾張守護代家の岩倉織田氏を滅ぼし25歳で尾張を統一した。
この間、19歳の時に亡き父に仕えていた重臣平手政秀が、信長の素行を諫(いさ)める為に切腹するという事件があった。尾張が統一された時、側近たちは「ここまで強大になるとも知らず平手政秀が自害したのは浅薄でした」とお世辞を言うと、信長は「こうやって弓矢を執れるのは、みな政秀が諫死したおかげだ!わしが自分の恥を悔やんで過ちを改めたからだ!古今に比類ない政秀を、短慮と言う貴様らの気持ちが口惜しいわ!」と顔色を変えて激怒した

 

그는 이미 18세에 천하를 통일하는데 뜻을 둔데다 19세에는 이미 야심적 주변을 장악하며 23세에는 친 동생을 암살한다. 25세에 오와라 지역을 장악한다. 그를 심히 못마땅하던 그의 부친 심복이 자살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가 친동생을 사살한 이유가 있다. 야심만 있고 의리가 없는 동생이  노부나가를 죽일 음모를 알게 된다. 과거 일본 전국 시대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사살되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그리하여 동생을 사살하게 된 것이다.

 

1560年(26歳)、桶狭間で休息中の駿河・今川義元の大軍2万5千を、たった2千の兵で奇襲攻撃し見事に勝利。これによって信長の武勇は全国に広まった。※桶狭間への出陣前、信長は「人間五十年 下天の内を比ぶれば 夢幻のごとくなり 一度生をう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と舞った。
翌々年、今川から独立した三河の徳川家康と同盟。清洲から小牧へと本拠を移し美濃(岐阜)に侵攻する。美濃の斉藤道三は子の義竜に討たれており、既に同盟は廃されていた。33歳、7年をかけて斎藤氏を滅ぼすと、本拠地を尾張小牧から稲葉山城に移し、「天下布武」(武家の政権を以て天下を支配する)の印を使い始める。
34歳、足利義昭を奉じて京都に入り、義昭を15代将軍にして室町幕府を再興するが、事実上の権力は信長にあり、義昭との関係は悪化した。

 

 

26세에 거의 일본의 절반을 장악하며 34에에 교토에 입성한다. 특히 쇼군 무라마치의 권력은 없고 사실상 노부나가의 힘이 막강해진다. 그는 이때 이미 인생은 50세로 정하고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 자다. 천황에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 노부나가가 된다. 여기서 일본인들이 천황을 향한 목숨을 바친 전쟁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어려운 부분이다.

 

 

信長の勢力拡大に不満を持つ将軍義昭は、武田、朝倉、浅井、毛利、三好ら諸大名や、石山本願寺、比叡山延暦寺などの宗教勢力に呼びかけて、信長包囲網づくりを進める。これに対抗して信長は家康に援軍を要請。
1570年(36歳)、浅井&朝倉両軍に近江姉川の戦で勝利すると、両氏に味方した延暦寺を翌年焼き討ちし、僧侶、一般人を問わず男女約4千人を皆殺しにした。38歳、戦国最強と言われた甲斐の武田信玄が京都に進軍を開始、家康の領国へ侵攻してきた。武田軍は強敵で、遠江三方原(みかたがはら)の戦において織田・徳川連合軍は完敗!ところが何と信玄が結核で急死。武田軍は甲斐に引き返し信長・家康は命を繋いだ。
翌年、未決着だった浅井氏を近江小谷(おだに)城で滅ぼし、一気に越前まで進んで朝倉氏も討ち取ると、畿内に戻って、京都宇治で挙兵した将軍義昭を追放して室町幕府を滅ぼした。

1575年(41歳)、三河長篠の合戦では3千挺の鉄砲を用意(当時は海外にもこんな軍隊はない)。信玄の子勝頼が率いる武田騎馬軍を粉砕し、近代戦の幕をきる。これで東国からの侵攻の懸念が消えた。翌年に天下統一の拠点として7重の大天守閣を持つ安土城の造築をスタート。長男信忠に織田家の家督を譲り、自身は安土に移った。43歳、秀吉を中国攻めに出陣させ、西国の雄・毛利氏との対決が始まる。織田軍の勢力拡大と共に朝廷の位は正二位右大臣まで上がったが、もはや覇業に朝廷権力は無用と、1578年(44歳)、全ての官職を返上した。

 

노무나가는 결국 1570년 36세에 정벌을 위하여 일반시민, 승려 3천명을 사살하기 이른다. 여기서 주지할 사실이 있다. 전국 통일에 피의 전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많이들 오해와 억측을 만드는데 전쟁을 평화가 아니다. 노부나가의 업적은 19개로 나뉜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점에 귀추가 주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당시의 불교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다. 군대를 가진 막강한 힘이었고 시민의 경제를 뒤흔드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불교의 절은 이슬람처럼 집단 거주하기 때문에 절의 힘을 죽이기 위해서는 살생이 불가피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종교활동 하는 승려와는 다른 점을 들고 싶다. 부녀자와 승려가 아니라 그들은 집단으로 호의호식 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가진 군대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일본이 다른 불교와 판이한 이유는 대처승에 세습제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국립 절이 없다. 일본의 모든 사찰은 이제 여관 사업으로 뛰어들어 승려들의 상업적인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信長暗殺の真の黒幕は誰か?光秀と公家には深い親交があったことから、近年では朝廷と見る意見が多い。延暦寺焼き討ちでは天皇が認定した国師(高僧)が焼かれ、本能寺の変の2ヶ月前にも国師快川和尚が信長の敵を匿った罪で焼き殺されている。国師を殺すと言うことは、天皇を全く恐れていないと言うこと。信長は室町幕府を潰した時に、暦を元亀から天正へ勝手に改暦しており、官位も返上している。光秀謀反の前月には天皇が信長に勅使を送り幕府開設を勧めるが、これも無視された。信長はルイス・フロイスら宣教師から聞いた欧州の絶対王政を目指しており、国王になるつもりだったのだ。その為には天皇を殺し(王は2人もいらない)、朝廷公家を滅ぼす。皇室はこれを阻止せんが為に光秀を利用し信長を葬ったという

 

노부나가 암살의 실제 지휘 누가 했을까?

미쓰히데 조정는 깊은 교제가 있던 것, 최근 다른 시각으로 재분석한다. 그의 제자 미쓰히데는 늘 불만에 찬 생활을 하면서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를 각별히 중요시하자 결국 황실을 칠것이라는 음모설을 퍼뜨리고 황실의 도움을 받고 1만2천의 군대를 끌고 1582年 本能寺 경내를 침입한다. 그러므로 노부나가는 어쩌면 황실에 의한 누명으로 자살 유도한 셈이다. 그 사실은 이후 히데요시가 그를 살해하고 천황에게 진실을 말하게 된다.

 

信長は武闘派として知られるが、内政でも様々な改革を推し進めた。経済発展のカンフル剤として課税を免除した楽市・楽座を設定し、流通をよくする為に関所を廃止、政教分離の徹底、検地、刀狩など新政策を次々と実行した。外国文化への好奇心が強く、式典の際はビロードのマントと西洋の帽子を着用し、側近には彌介(やすけ)と名付けた黒人もいた。信長はまた、茶の湯、能楽、鷹狩り、相撲などをよく好んだ。茶の湯は政治にも利用し、千利休&今井宗久らを召抱えて、家臣に茶の湯の開催権や茶器を恩賞として与えた。命令、規律は絶対であり、家臣は信長の一声で飛び散る様に従った。その一方で、秀吉の妻(ねね)へ夫婦喧嘩仲裁の手紙を書くなど、面倒見が良い一面もあった。

 

노부나가는 대단한 개혁을 한 사람이다. 경제발전은 물론 과세를 없애고 외국문화를 개방하였으며 서양 복장을 들여왔고 차의 문화의 발전에 차를 이용한 목욕, 사냥, 스모, 검도 등 발전을 하게 된다. 항상 히데요시 부인 네네와의 부부 중개자로 자상한 면도 많았으며 그 중개를 편지로 보인 사람이다.

 

 

イエズス会宣教師ルイス・フロイス『日本史』より(信長を身近で見ていた者の非常に貴重な資料!)

彼は中くらいの背丈で、華奢(きゃしゃ)な体型であり、声は高く、極度に戦を好み、軍事的修練にいそしみ、名誉心に富み、正義において厳格であった。彼は自らに加えられた侮辱に対しては懲罰せずにはおかなかった。幾つかのことでは人情味と慈愛を示した。彼の睡眠は短く早朝に起床した。貪欲でなく、よく決断を秘め、戦術に極めて老練で、非常に性急であり、激昂はするが、平素はそうでもなかった。
彼はほとんど家臣の忠言に従わず、一同から深く畏敬されていた。酒を飲まず、食を節し、人の取扱いは実に率直で、自らの見解に尊大であった。彼は他の大名をすべて軽蔑し、頭の上から話をした。そして人々は絶対君主に対するように服従した。彼は戦運が己れに背いても心気広濶、忍耐強かった。


彼は善き理性と明晰な判断力を有し、神および仏のいっさいの礼拝、尊崇、ならびにあらゆる迷信的慣習の軽蔑者であった。形だけは当初法華宗に属しているような態度を示したが、顕位に就いて後は尊大にすべての偶像を見下げ、若干の点、禅宗の見解に従い、霊魂の不滅、来世の賞罰などはないと見なした。
彼は自邸においてきわめて清潔であり、自己のあらゆることの指図に非常に良心的で、対談の際、だらだらした前置きを嫌い、ごく卑賤(ひせん)の者とも親しく話をした。彼が格別愛好したのは著名な茶の湯の器、良馬、刀剣、鷹狩りであり、目前で身分の高い者も低い者も裸体で相撲をとらせることを甚だ好んだ。何ぴとも武器を携えて彼の前に罷り出ることを許さなかった。彼は少しく憂鬱な面影を有し、困難な企てに着手するに当ってははなはだ大胆不敵で、万事において人々は彼の言葉に服従した。

美濃の国で見た全てのものの中で、最も私を驚嘆せしめましたのは、この国主(信長)が如何に異常な仕方、また驚くべき用意をもって家臣に奉仕され畏敬されているかという点でありました。即ち、彼が手でちょっと合図をするだけでも、彼らは極めて兇暴な獅子の前から逃れるように、重なり合うようにしてただちに消え去りました。そして彼が内から一人を呼んだだけでも、外で百名が極めて抑揚のある声で返事しました。彼の一報告を伝達する者は、それが徒歩によるものであれ、馬であれ、飛ぶか火花が散るように行かねばならぬと言って差支えがありません。都では大いに評価される天皇の最大の寵臣のような者でも、信長と語る際には顔を地に着けて行なうのであり、彼の前で眼を上げる者は誰もおりません。

 

예수교 선교사 에이스 프로이스의 귀중한 자료를 공개하다. - 이 책은 서양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 특히 일본어로 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보통 체격의 귀여운 인상이며 목소리가 크고 높고 극한 전쟁을 즐기며 특히 공정하고 냉정한 사람이며 자신에게 모욕하는 자는 처벌하지 않았다. 그는 인정미와 자비를 최후에 베푸는 자다. 그는 새벽 일찍 기상하며 향을 피우지만 종교를 믿지는 않았으며 탐욕심이 없으며 결단력이 있는 자로 전술에 노련했으며 전쟁에서의 성급함은 평소와 다른 점도 있다.

 

 

술 마시지 않고 절식했으며 사람들 앞에서는 늘 솔직했으며 복종하게 하였다. 성격은 명쾌하며 판단력이 우수하며 종교는 법화종인 듯 했지만 그는 실제 예배나 예불 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선종을 따른 사람이다. 그의 집은 매우 깨끗하고 아주 청결한 사람이며 겸손한 생각을 하는 자를 좋아하며 사냥과 검술, 스모를 유달리 좋아했으며 그의 말에 불복할 수 없는 손 하나로 모든 것을 지시했던 사람이라고 술회했다. 천황 빼고는 노부나가 앞에서 눈을 올리고 똑바로 보는 자는 없었다.

 

 

信長墓と伝えられるものは阿弥陀寺、大雲院、大徳寺総見院、妙心寺玉鳳院と京都だけで5ヶ所あり、他にも和歌山・高野山(1970年に供養塔を発見)、滋賀・安土城二の丸跡(一周忌の法要後に秀吉が信長の太刀や烏帽子を納めた)、大阪・堺の南宋寺本源院(信忠も一緒)、富山・瑞龍寺(前田利長が信長父子の分骨を納めた)、岐阜・崇福寺(信長父子の遺品を側室・お鍋が寺内に埋め位牌を安置)、静岡・西山本門寺(信長と懇意の囲碁名人・本因坊算砂が作らせた首塚がありヒイラギの木が植えられている)など、全国に最低でも20ヶ所以上ある。信長を祀った神社も各地に存在する。

 

위의 글은 노부나가에  관련 납골과 관계가 깊은 사찰이 있으며 그 자료들이 보관 되어 있다. 교토, 도야마, 오사카 사카이, 기후, 시즈오카, 고야 산 등 전국 최저 20군데의 자료가 있다.

 

信長は朝廷をないがしろに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建勲神社の説明文は異常なほど信長への大絶賛。
『贈・太政大臣正一位織田信長公 織田信長公は戦火の巷と化した応仁の大乱に終止符を打ち、民衆を疲弊絶望から救い、伝統文化に躍動の美を与え、新秩序を確立して日本史に近代の黎明を告げ、西洋を動かす力の源を追求し、悠然として東西文化交流を実行した。明治天皇より特に建勲の神号を賜い、別格官幣社に列せられ、ここ船岡山に大主の神として永遠に奉斎されている』
太政大臣は左大臣・右大臣より上位にある最高位の官職。信長は生前に官位を“無用”と返上しているのに、それでもなお死後に太政大臣を贈るとは。しかも建勲神社は御所や二条城を見下ろせる船岡山にある。これほどの朝廷のへりくだり方は、信長のタタリを恐れ、神にすることで裏切りの怒りを封じようとしているとしか思えない。

 

建勲神社의 간판에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민중 피폐, 절망에서 구원하고, 전통문화와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일본 역사에서 근대 여명기를 말하면달리는 힘의 원천을 추구하고  동서 문화 교류를 실행했다. 메이지 천황은 여기에 그에게 칭호를 준다. 그는 사후에 최고 대신의 칭호로 봉분 되어 모시고 있다.

 

 

이처럼 천하를 통일하고 머리가 비상하고 전략이 뛰어나며 때로 냉철한 그를 알 수 있는 것은 문헌 이상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 당시의 문헌이나 그를 보았던 선교사들의 기억을 더듬은 책들이다. 그러나 일본처럼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절의 힘이 막강하던 시절에 군대를 가진 사찰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면서 자신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할 것과 50대에 죽을 것을 이미 결정한 그를 보면서 인간의 예지력과 통찰력을 느낀다.

 

 

 

그의 지략이라면 부하 한 명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천황으로의 지시를 받은 사실 자체에 승복한 것이다. 그의 할복은 어떤 의미에서 천황에 대한 예의였다. 자살은 일본인으로서 갖는 최후의 복종과 진실이므로. 또한 승복할 때도 할복한다. 일개 부하의 계략을 몰랐을 그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군인칙유-軍人勅諭 천하의 장군이다. 천황을 칠 생각이 없음에도 사악한 부하의 계략으로 천황이 분노하게 되면서 1만 군사를 조력한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병사가 절에 100명도 되지 않았다. 정말 그 배신자 부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오히려 바로 목을 바로 칠 수 있는 자였다. 그러한즉슨 오나 노부나가는 함부로 매도할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그 어떤 조건에도 굴하지 않았으나 천황 앞에 목숨을 놓은 사람이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만약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적인 배경에 다 된 밥에 숟가락을 들지 않을 미련한 사람이 있었을까? 오히려 하극상으로 천황을 치려도 음모를 계획했을 것이다.

 

 

일본의  시대적  영웅은 자결했거나 죽임을 당했다. 어쩌면 가장 비열하고 졸렬한 닌자들만이 남은 현상을 현재 보는 느낌이다.

정치가의 후예들은 그 중요한 인물을 사살한 닌자의 후예가 아니고선 이런 오늘의 일본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개탄을 금치 못하는 일본의 현실과 시대적 영웅 오다 노부나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오다 노부나가. 사가모토 료마의 정신을 가진 일본인인 최소한 없다고 본다.

 

 

일본 역사는 무시하고 무조건 일본은 안다고 섣부른 용단을 내려서도 안 된다.

지금 쏟아지는 인터넷 홍수 글들 속에 사실과 다른 글들이 많다.

오다 노부나가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그의 역사적인 근원지인 책에서부터 차근하게 시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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